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리처드 닉슨]]의 압도적인 우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2년 대선 여론조사.png|width=100%]]}}} || 이미 1972년 5월 발표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닉슨은 '''53% 대 34%'''로 19%p차이로 맥거번을 앞지르고 있었으며, 맥거번은 민주당의 혼란과 주요 정치인들의 지지 거부로 닉슨에게 형편 없이 뒤쳐지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은 주로 기성 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닉슨은 21세 이상의 모든 세대, 흑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 매사추세츠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 심지어 노동조합원들의 표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반면, 조지 맥거번은 거의 모든 세대와 지역에서 밀렸으나 대학생과 청년 표에서만큼은 닉슨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맥거번 캠프의 자체 분석에 의하면 18~21세 구간 청소년 및 대학생들의 80% 이상이 맥거번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맥거번의 지지가 앞섰으므로 [[뉴욕]], [[일리노이]], [[위스콘신]] 등의 지역에서 맥거번이 근소하게 우세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닉슨이 거의 일방적으로 20%p 가까이 앞서나갔고 맥거번이 확실하게 앞설 것으로 예상된 지역은 케네디 가문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치고 있던 [[매사추세츠]] 단 한 지역 뿐이었다. 조지 맥거번 선거 캠프의 전략가였던 게리 하트(Gary Hart)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선거 전략을 뒤집는 새로운 선거 전략을 내세웠다. 기존 민주당은 노동조합과 백인 서민층에게 어필하는 전략을 [[뉴딜연합]]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대학생과 청년, 다인종, 여성 등 닉슨 행정부에 의해 소외된 소수 그룹에게 다가가기로 한 것이다. 또한 [[존 레논]], [[밥 딜런]] 등 인지도가 있던 많은 락스타들이 닉슨을 비판하고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였으므로 이들의 영향을 받는 청소년과 히피 표가 조지 맥거번에게 모일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이후 적극적인 좌익 활동으로 청년좌파운동 및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게리 하트의 전략은 1972년 민주당 경선에서는 힘을 발휘했지만, 1972년 대선 본선에서는 중도소구력이 약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당의 성향 변화와 더불어 기존의 노동조합의 힘이 약해지자, [[빌 클린턴]]은 이 전략을 대대적으로 차용하여 노동조합 대신 여성과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는 전략을 사용해 이후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게리 하트는 1974년 중간선거에서 [[콜로라도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1984년 대선에서 프론트러너로 활약하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게리 하트는 맥거번 선거 운동을 도운 것과 별개로 기존 민주당의 의제였던 경제적 평등이나 노동권 등보다 다인종 도시 청년층 중심의 중도적인 혁신 정책을 내는데 더 관심이 있던 인물이었다. 비록 게리 하트는 1988년 대선에서 불륜 논란으로 정계 은퇴했지만, 하트의 전략 방향을 앨 고어와 빌 클린턴이 많이 계승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에 민주당의 역사에서는 꽤 중요한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